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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그들 역사의 이방인들 - 섞임과 넘나듦 그 공존의 민족사 (커버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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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그들 역사의 이방인들 - 섞임과 넘나듦 그 공존의 민족사

너머북스

이희근 지음

2008-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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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저자소개
목차
“우리 안의 그들! 역사의 이방인들,
다색의 무늬를 가진 이방인들이 섞이고 넘나드는 가운데
결국 우리가 되어 온 그 역사에 관한 책이다”


1. 섞임과 넘나듦, 그 공존의 민족사를 위하여

한반도는 한중일 세 나라가 공유하는 바다의 한 가운데에 있다. 한반도는 대륙과 해양으로의 길이 모두 열려 있다. 이곳은 종종 국제적 갈등의 중심지가 되기도 하였으나, 그만큼 세계로 향해 진출하는 출발점이자 세계가 몰려드는 종착점이기도 하였다. 한반도에는 알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많은 종족과 민족의 사람들이 대륙과 해양의 길을 따라 대개는 필요에 의해 자연스럽게 유입되었지만 때로는 전쟁 같은 충돌을 동반하며 몰려들었다. 《우리 안의 그들! 역사의 이방인들》은 다색의 무늬를 가진 이방인들이 섞이고 넘나드는 가운데 결국 우리가 되어 온 그 역사에 관한 책이다.

이민족 이주의 역사는 고대로부터 조선시대까지 끊임이 없었다. 한민족과 가장 친근한 여진인을 비롯하여 중국인, 거란ㆍ여진ㆍ 몽골 등 북방 유목민족, 일본인 심지어는 이슬람 세계의 사람들도 한반도에 스며들었다. “임금이 면복 차림으로 왕세자와 문무의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망궐례를 의식대로 행하고, 강사포 차림으로 근정전에 나아가서 조하를 받았다. 왜인이나 야인, 귀화한 회회인, 승인 그리고 기로들이 모두 조하에 참예하였다.”라는 세종실록 9년 1월 1일자 기록이 증언하듯, 조선 초기만 해도 대조회와 같은 국가 행사에는 문무백관을 비롯하여 일본인, 여진인, 및 무슬림의 대표도 참석하였다. 이 책은 한국 사회의 다민족적 성격이 최근의 현상이 아니라 전통시대에는 그 정도가 훨씬 더 심했음을 보여준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북방 유목민족 거란과 몽골의 후예인 백정이 조선 초기 전체인구의 1/3 내지 1/4 정도를 차지할 정도라고 한다. 유목민족은 기록상으로 고려 때부터 연이어 한반도로 이주해 왔다. 중국인도 중국대륙의 정치적 혼란기마다 대거 한반도로 유입되었는데 명ㆍ청 교체기 조선으로 피난 와서 정착한 수십만 명의 중국인 유민의 규모도 단적인 예이다. 이방인 유입의 파동은 고대로 갈수록 깊다. 국경 개념이 그다지 분명하지 않았던 까닭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는 진한과 변한의 건국 주도 세력을 진나라의 폭정을 피해온 진나라 유민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기술한다. 만주 일대와 한반도 북부에 거주하고 있던 여진인 또한 한민족의 일원이 되었다. 태조 왕건이 후백제와 전쟁을 벌일 때 여진 출신 기병 1만 명을 동원할 정도로 상당수의 여진인이 고려에 편입되었다. 왜인으로 대변되는 해양세력도 일찍부터 한반도 남부에 정착해 살고 있었다. 한반도 남부에 ‘왜’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역사상 한반도와 아랍간의 교류는 신라 때부터 있어 왔으며 이때부터 이들도 한반도에 정착해 살았다. 앞에서 보듯 조선 정부의 공식 행사에 매번 ‘회회인’으로 표현된 무슬림 대표가 초대받을 정도로 조선에 살았던 무슬림 사회의 영향력은 무시 못할 정도였다.
역사의 이방인들은 그 출신이 대륙이든 해양이든 간에 한반도의 구성원이라는 인식, 즉 정체성을 분명히 지니고 있었다. 고려의 거란인은 자신들에 대한 부당한 차별만 없애준다면 거란 침략자를 물리치는 데 앞장서겠다고 강조한다. 임진왜란 때 투항하거나 포로로 잡힌 일본인 역시 군인, 무기 제조, 검술 교습 등 여러 분야에 종사하여 조선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나름의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역사의 이방인들은 문화의 다양화와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거란과 몽골인의 이주로 한반도에 육식문화가 확산되었다는 것이 그 사례라 할 수 있다.

《우리 안의 그들! 역사의 이방인들》는 현재 한국인의 관념 속에 자리하고 있는 ‘한민족은 단일민족’이란 만들어진 역사 즉, 허구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 책은 신화가 아닌 ‘역사의 눈’으로 볼 때 그 놀라운 사실들이 역사와 어떻게 부합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고대의 진나라의 유민이 세웠다는 진한이나 한반도 남부의 ‘왜’ 존재설에서 조선시대 들풀처럼 기층민으로 살았던 ‘백정’이란 존재조차도 단일민족이라는 신화를 걷어낼 때 비로소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왕조시대 이방인들의 이주와 스밈의 과정은 가혹한 차별을 동반했다. 그들의 문화를 포용하지 않는 야만적인 태도를 보여 왔던 것이다. 다민족사회가 된 현재는 어떠한가? 지금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각종 언론 매체를 통해 이주민의 피해 사례들을 자주 접한다. 이주 여성의 47%가 “이혼을 원한다”든가, 다문화가정의 청소년 여섯 명 가운데 한 명만이 “스스로 한국인이라고 생각한다”는 설문조사 결과가 나오고 있다. 다민족ㆍ다문화 사회가 되었다는 현재 한국사회에서도 그러한 양상이 일고 있는 것을 보면 “역사는 반복된다”는 격언이 역설적이게도 허무맹랑한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저자는 머리말의 끝머리에서 다원적인 것에 관한 ‘관용’의 메시지를 전한다.

“이제 한국인은 이러한 유엔의 권고를 차치하더라도 역사상 극소수에 불과한, 세계의 패권을 장악한 국가들인 로마, 중국의 당, 몽골, 네덜란드, 대영제국, 미국 등의 역사에서 배워야 할 교훈이 있다. 이러한 국가들은 한결같이 다원적이고 관용적이었기에 제국을 이룰 수 있었다. 한마디로 인종, 종교, 민족 등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공존하고 번영할 수 있도록 허용했기에 세계적인 패권을 휘두른 극소수의 제국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머리말 중에서

2. 조선의 마이너리티 백정, 그 역사적 원류를 찾아서 - 북방 유목인 거란, 달단

우리 역사에는 양인이면서도 천인에 가까운 대우를 받았던 소수집단이 다양하게 존재했다. 의금부의 나장, 지방 관청의 일수, 관아의 조예, 조운창의 조졸, 역참의 역보, 수영의 수군, 봉화대의 봉군 등 이른바 7반천역이 바로 그들이다. 국가의 역 체계에 포함되었기에 양인의 거주지에서 함께 살았으며 신분상승의 기회까지 있었다. 그러나 이들과 달리 평민조차도 상종하지 않은 집단이 있었으니 바로 ‘백정’이다. 고려시대의 백정은 일반 백성을 뜻하는 말이었지만 조선시대의 백정은 더 이상 평민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닌 매우 특이한 집단이었다. 백정은 자기들끼리 혼인하고 그들만의 집단을 이루며 도축을 주업으로 하면서 사냥, 기예, 유기 및 가죽제품의 제조와 판매업에 종사했다. 조선의 개국과 함께 정부의 지속적인 도살금지 조치로 인해 불법도축이라는 생계형 범죄에서 강도, 살인 등에 이르기까지 아예 백정집단은 모든 범죄의 온상이 되어버렸다. 백정은 조선시대의 마이너리티였다. 백정이란 표현은 모욕적인 표현이었으며 악독하거나 천한 것을 비유하는 말이 되었다. 일상생활에서뿐만 아니라 혼례와 상례, 제례에서도 심한 차별을 받았다. 결혼식 때 백정은 말이나 가마를 탈 수 없었고 비녀를 꽃아 머리조차 올리지 못할 정도였다. 상례 땐 상여도 이용할 수 없었고 묘지도 일반인과 따로 잡아야 했다.

“양반은 물론 일반 백성조차도 사회적으로 백정을 야만족으로 취급하여 그들과는 혼인은 물론 자신의 거주지에서 살지 못하게 하는 등 심하게 차별하였다. 그 결과 백정은 양인의 거주지인 촌락의 외진 곳에 집단을 이루어 살아야 했다. 복장에서도 그들은 차별을 받았다. 명주옷은 말할 것도 없이 양인의 평상복인 넓은 소매의 겉옷조차 입을 수 없었다. 물론 망건, 가죽신도 착용할 수 없었다. 평민이 쓰는 검은 옻칠을 한 갓 역시 쓸 수 없었다. 심지어 백정은 어린아이에게조차도 늘 머리를 숙이고 자신을 소인이라 부를 정도로 ...”
- 본문 172쪽 중에서

그런데 저자가 이 책에서 새로이 주목한 점은 이들 백정 집단이 조선시대의 전체인구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율이 상당히 높았다는 것이다. “재인(백정)이 한 고을에 사는 수는 평민에 비교하여 1/3, 1/4이나 되는데도 신역이 없고”-『성종실록』 성종4년 12월 18일자의 기록이나 “남원에서는 품관들이 강성하여, 부내의 재인과 백정이 본래 2천여명이었는데 모두 품관이 부리는 바 되어 한 품관이 30-40명씩 거느려”-『중종실록』 중종 7년 11월 4일자의 기록(당시 남원부의 총인구수는 5천 여명으로 추산) 등에서 알 수 있다. 조선의 하층민으로 들풀처럼 수없이 존재했던 이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사람들일까?

이 책에서는 ‘6장-고려의 거란인 사회, 7장- 몽고인의 후예 달단, 9장- 북방 유목민 백정이 되다’ 등 3개 장에 걸쳐 북방 유목민의 한반도로의 이주와 충돌, 그 뒤섞임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조선시대 백정집단을 배태한 주력군은 거란으로 이들은 고려와 거란간의 세 차례에 걸친 전쟁동안(993-1018) 대규모로 유입되었다. 993년 이후 25년간 고려와 거란 사이의 전쟁 와중에 투항하거나 포로로 잡힌 거란군만 해도 수만명이 이르렀다. 몽골인의 후예인 달단도 조선 초 백정집단의 한 구성원이 된다. 달단은 고려와 원나라간의 강화 이후 고려에 왔던 관리와 그 시종, 군인 및 군속 그리고 목동 등으로서 그 상당수가 한반도에 그대로 정착한 것이다. 이들 대부분은 농경사회에 길들여지지 못한 채 본래의 유목민족적 생활방식대로 살아갔던 것이다.

3. 중국인, 대륙이 흔들릴 때마다 한반도로 떠 밀려왔다 - 중국인

중국 대륙의 정치적 혼란기마다 중국인은 대거 한반도로 유입되었다. 명, 청 교체기에 조선으로 피난 와서 정착한 요동지방 유민이 그 단적인 사례이다. 1616년 청 태조 누르하치는 후금을 세우고 요동지방을 침입한다. 동아시아 세계는 임진왜란에 이어 또 다시 전쟁에 휩쓸리게 된 것이다. 전쟁 초기부터 조선의 국경을 넘기 시작한 중국인 피난민은 십년이 채 안되어 “모장(모문룡)이 수십만의 남녀를 거느리고 우리 변경에 살고 있다”는 『인조실록』인조 4년 3월 26일자의 기록이 보여주는 것처럼 1626년에 와서는 무려 수십만 명에 달하는 중국인이 조선으로 피난 왔던 것이다. 과연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후금은 망명자가 생길 때마다 송환을 요구해 왔으나 조선정부는 소극적인 대응으로 일관했다. “여러 대에 걸쳐 살았기 때문에 우리 백성들과 혼인하여 자손이나 친척이 서로 뒤섞여 있다”는 『인조실록』인조 19년 1월 2일자 구절이 말하듯 쇄환이 쉽지 않았으며 더욱이 이미 여러 세대 이전에 조선으로 귀화해 사실상 조선의 백성이 된 일단의 중국인의 존재까지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의 저자는 명, 청 교체기에 조선으로 유입된 중국 망명인 가운데 상당수가 조선에 눌러 살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런 현상은 고대국가 성립 초기부터 있어 왔는데, 그 정도는 훨씬 더 심했다. 당시에는 국경 개념이 그다지 확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신라와 가야의 전신이 되는 진한과 변한의 24개국을 주도한 세력을 각종 문헌자료를 근거로 하여 진(秦)의 유민이라 파악한다. 진나라의 폭정을 피해 그 유민들이 대거 한반도 남부로 옮겨왔다는 것이다. 이는 삼한의 기원에 대해 토착세력의 성장이란 관점에서 파악하는 한국 역사학계의 일반적 견해나 마한의 경우는 토착세력인 반면에 진한과 변환의 기원은 고조선 계통의 북방 이주민이라는 일부 견해와도 배치된다. 저자는 진ㆍ변한의 건국 세력은 토착세력도 북방 이주민도 아닌 진나라 유민 출신의 중국인이라는 것이다. 진, 한 교체기에도 중국인이 고조선으로 파도처럼 밀려들어 왔는데, 위만조선을 건국한 위만과 중국 이주민이 바로 그들이다.

“진한과 변한의 민족?인종적 기원이 토착세력일까, 고조선 계통의 이주민일까. 우선 진한의 기원에 대해서 살펴보자. “진한(辰韓)은 그 노인들이 스스로 말하되, 진나라의 망명한 사람들로서 고역(苦役)을 피하여 한국(韓國)에 왔다.”는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진한의 기원은 역사학계의 주장처럼 토착세력도, 고조선 계통도 아닌 중국 진나라의 이주민이었다. 『삼국지』도 이와 같은 『후한서』의 기사와 거의 같은 기록을 전하고 있다. 이처럼 진한의 민족?인종적 기원을 기록한 문헌 자료에서는 한결같이 진한 12국을 건국한 주력이 진나라 이주민임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변한의 민족?인종적 기원에 대해 직접적으로 기록한 문헌 자료는 없다. 다만 『후한서』를 비롯한 문헌 자료들에서는 변한의 기원이 진한과 그 계통이 같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정보를 전해주고 있다. 가령 “변진은 진한 사람들과 뒤섞여 살고 있다. ……의복과 주택은 진한과 같으며, 언어와 법속(法俗)도 서로 비슷하다.”는 『삼국지』 동이전처럼, 변한의 12개국의 건국 주체는 그 언어와 풍속 등이 진한과 유사하여 뒤섞여 살 정도로 민족?인종적 기원이 같았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마한의 민족?인종적 기원은 토착세력인 반면에, 진한과 변한의 주력은 역사학계의 주장과 달리 진나라 유민이었던 것이다.”
-저자의 말

4. 해양세력들 또한 조선의 구성원으로 살았다 - 일본인과 무슬림

한반도는 대륙을 통해 중국인이나 북방유목민이 유입된 것처럼 해양으로의 길 또한 열려 있어 왜, 무슬림 등의 해양세력이 들어와 살았다. 임진왜란 때 전쟁포로나 투항한 왜인이 조선에 정착하면서 귀화 일본인이 급격히 증가하였지만 사실 이주 일본인은 이미 조선 초기에도 상당수 존재했다. 태종 때 서울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만 100명이 넘었다는 태종실록의 기록(태종 16년 8월 23일자)이나 “왜구의 괴수 5명이 수백 인을 거느리고 모두 갑옷을 벗고 배에서 내려와서 줄지어 절을 하고 명령을 기다렸다”는 『태조실록』태조 5년 12월 29일자의 기록 등을 그 사례이다. ‘왜(倭)’로 대변되는 해양세력은 일찍이 한반도 남부에 정착해 살고 있었다. 이 책의 3장 ‘한반도 남부에 왜가 있었다’에서 왜의 한반도 남부 존재에 대해 문헌의 기록을 통해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저자는 이미 1-2세기경 왜는 한반도 남부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 왜인세력은 4세기 말엽에는 백제와 신라의 태자 등 왕실의 직계 자손을 인질로 잡고 있을 만큼 주변 나라를 압도했으며 그 인구도 신라와 백제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는 견해를 펼친다.
좁은 해협을 마주한 일본뿐만 아니라 저 멀리 무슬림 세계의 사람들까지도 우리 역사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조선초기 정부의 공식 행사에 매번 ‘회회인(回回人)’으로 표현된 무슬림 대표가 초대받아 참석했다는 것을 보더라도 조선에 정착한 무슬림의 수와 사회의 영향력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상 한반도와 아랍간의 교류는 신라 때부터 존재해 왔으며, 이때부터 아랍인도 한반도에 정착해 살았다. 경주 쾌릉의 무인석이이나 처용 존재 등의 사례가 이를 반증한다. 더구나 중세 아랍 측의 문헌에는 무슬림들이 신라에 정착했다는 기록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가능성을 더욱 확고하게 해주고 있다.

“바다를 따라가면 중국 다음에는 신라국과 그에 속한 도서를 제외하고는 알려졌거나 기술된 왕국은 없다. 신라국에 간 이라크인이나 다른 나라 사람은 공기가 맑고 물이 좋아 토지가 비옥하며, 또 자원이 풍부하고 보석도 일품이기 때문에 극히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알 마스오디(al-Masaudi, ?-965년) 『황금초원과 보석광』, 본책 68쪽

“중국의 맨 끝 깐수의 맞은편에는 많은 산과 왕(국)들이 있다. 바로 신라라고 하는 나라이다. 이 나라에는 금이 풍부하다. 무슬림들은 이곳에 일단 들어가면 그곳의 훌륭함 때문에 정착하고야 만다.”
-이븐 쿠르다지바(Ibn Khurdadhibah, 820-912년) 『도로 및 왕국 총람』, 본책 68쪽

5. 저자는 이 책에서 이방인과 관련된 학계의 쟁점에 대해서도 나름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저자는 『삼국지』 동이전에 나오는 진왕세력은 에가미의 주장과는 달리 진왕 자체가 마한 출신으로서 독자적으로 왕조를 유지할 만한 힘이 없는, 마한에 예속된 존재임을 밝히는 등 여러 문헌 자료를 동원하여 에가미의 기마민족설은 역사적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위만의 출신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사기』 조선열전과 『한서』 조선전 등은 분명하게 위만은 연나라 사람(燕人)라고 기록한 점 등을 근거로는 위만이 연나라 출신일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마찬가지로 저자는 한?일학계의 최대 쟁점인 임나일본부는 여러 문헌 자료를 동원하여 가야가 한반도의 왜 세력을 정복한 후 이들을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기관, 즉 가야의 한반도 왜 통치기구라고 주장하고 있다. 아울러 처용설화의 주인공 처용이 무슬림세계 출신이라는 점, 발해의 시조 대조영은 고구려에 귀화한 여진인의 전신인 말갈인의 후손이라는 사실, 조선의 3대 의적 중 한 인물로 알려진 임꺽정은 의적이 아니라 도적의 우두머리에 불과하다는 점 등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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